옛날옛적에는, '지식'이라 함은 직접 머릿속에 있어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정보를 말했다. 수많은 책을 읽고 머리에 축적해 놓은 것이 자산이며, 그것만이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는 도구이자 재료였다. 당시의 전문가라 함은 그런 지식을 갖추고, 그래서 그 지식이 있음으로 해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내는 이들이었다.
라떼는, 내가 대학교 다니던 시기, 내가 졸업한 전산학 분야는 위에서 정의된 지식으로 먹고 살기에는 너무나도 정보량이 많았다. 매일같이 신기술이 나왔고 트렌드 변화를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교수님들조차 모든 정보를 가르칠 방법이 없었고, 답은 구글에 있었다. 그래서 구 교수님이라 불렀다. 수업을 들어도 돌아서면 잊어먹고, 기억한다 한들 기술이 바뀌면 어차피 다시 공부해야했다.
남는 건 핵심 원리와 그와 연관된 키워드들 뿐. 그래서 그 시절의 전문가란 그 키워드, 즉 레퍼런스를 아는 것이었다. 언제든지 새로 공부해서 업무에 필요한 정보를 다시 구축할 수 있는 밑바탕.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정보. 프로그래밍으러 치면, 데이터 양이 너무 많아지니 프로그램은 자체적으로 정보를 모두 올려두는 게 아니라 정보가 있는 주소만 가지고 있는거랑 같다. 즉, 포인터다.
문제는, AI가 나오고 나서 그것조차 너무 쉬워졌다는 것이다. 무슨무슨 개념? 그거 GPT에 물어보면 바로 나오지. 즉, AI포인터다. 주소는 하나인데 필요항 정보가 거기서 다 튀어나온다.
그러다보니 비전문가들도 챗봇 좀 쳐 보고 아는 척 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 그깟 거 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도 그거 알아, GPT 쳐보면 거기 나오거든. 매우 심플하다. 누구나 전문가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정말로?
세상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잖아.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내 이야기다. 업무적으로도, 아무리 전문직이라도 세부분야 들어가면 모르는 거 천지다. 아는 것도 까먹어서 헤메고, 지금은 정보가 더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모르는 건 더 늘어난다. 그럴 때면, 곧잘 착각을 한다. 그거, 대충 어떻게 프롬프트 치면 나오는 거네. 그 정도면 아는 거지.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 사람 없잖아.
거기에서 매우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무지를 자각함에도 교만이 나온다. 그 정도 찾아보면 다 알아 라는 마인드가 생긴다. 그건 타인의 전문분야의 무시로 이어진다. 그걸 자각할 때 마다 고개를 흔든다. 정신 차려야지. 그 악마의 유혹에 굴하는 순간, 진짜로 머저리가 된다. GPT로 대체 가능한 인재가 되는 것이다.
간접경험에 기반한 지식을 얻기 쉬워지는 만큼 오히려 체감이 중요해졌다. 그걸 해 보고, 얼마나 어떻게 하면 그게 되고 안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경험이 더 귀중해졌다. 그걸 가지고 있어서 전문가이고, 그런 경험을 토대로, 단순히 지식의 나열이 아닌 지식의 재구성이 가능해져야 전문가다. 흩어져 있는 개념들의 연결이 가능해져야 전문가다.
그렇지 않아도 현대에는 아는척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 아는 사람도 있지만, 어설프게 아는 사람도 있고, 전혀 모르는데 사기치는 사람도 있으며, 모른다는 걸 알기에는 그만큼도 몰라서 모르는 사람도 있다. 흔히 있지않은가. 책 한권 읽어 본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근데 요즘은 그 허들이 낮아졌다. 요즘은 프롬프트 한 번 쳐본 사람이 제일 무섭다. 심지어 그거 출력된 걸 읽어보기도 전에 자신이 아는줄 착각하는 사람도 허다할 것이다.
AI도 필요없다. 유튜브 쇼츠만 봐도 아는 체 하기 딱 좋다. 근데 요즘은 그 쇼츠도 AI로 만든다. 지식 과잉의 세상이다. 전문가 과다의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전문직이 사라질 거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개소리다. AI로 찍어내는 지식을 가지고 진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다. 정밀 중요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희귀하다. 그래서 사라진 건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라 초보자 사냥터라니까. 어설프게 이론만 좀 배우고 만 사람은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정말로 그걸로 일하고 실질적인 판단을 해온 사람은 되려 드물어서, 요즘 경력직 뽑으려고 다들 안달인 것이다.
정작 그 레벨업을 해올 신입을 안 뽑아주니 나중에는 헬파티가 벌어지겠지. 근데 어쩌겠어. 기업들은 원래 전문 경영인이란 이름의, 오늘만 살아남는 게 목표인 비정규직들이 경영한다. 물론 재벌이라는 오너 역시 대단히 책임감이 높진 않아보이니 나을 건 없다.
아무튼, 문제는 다들 착각을 하며 산다는 것. 어쩔 수 없다. 사회생활이란 게 또 그렇다. 몰라도 아는 척을 해야 한다. 겸손하면 무능한줄 안다. 그리고 또 한편, 팀원들의 밥줄이 걸려있는 이상 리더는 겸손하기만 한 것도 교만한거다. 가오도 팔아가며 살아야 한다.
다들 가짜 투성이인 거 알아도. 아니, 오히려 편하지. 오버해도 대충 얼마나 가짜인지 알아주고 넘어가준다. 배려하는 세상이다. 그러니,
혼자서 착각만 하지 않으면 된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 해도 서로 배려해주는 왕국에선 괜찮은 것이다.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만 알면. 아닌척 하면서 조금씩 입을 걸 찾아 입으면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중요한 건 이거다. AI가 답변해줄 거란 사실을 안다는 건 지식이 아니다. 전문성이 아니다. 이것만은 알고 넘어가야한다. 왜냐하면 모르면 계속 공부하게 되고, 판단하기 전에 고민하게 되며, 판단한 후에도 고찰하게 되니까. 고칠 수 있다. 물론 다소 결정장애가 오는 부작용은 있을 수 있다. 그건 다른 스킬, 뻔뻔함과 능글맞은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걸 인정하면 오히려 편해진다. 적당히 몰라도 된다고 인정하면 성가신 것들은 AI포인터만 가지고 있어도 되니까.
그거 알아요? 아뇨, 근데 그거 GPT 쳐보면 나오는 거잖아요. 지금은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시죠.
의외로 사람들은 관대하다. 모른다고 하면 가르쳐준다. 전문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그렇다. 다들 자기가 모르는 영역이 있는 걸 알고, 또 그럼에도 아는 척 하며 살지만, 서로 모른다는 걸 보듬어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걸 물고 늘어지며 깔보는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것도 모를 가능성이 높다. 같이 일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지식의 시작은 자신이 모른다는 걸 알 때부터이다. 그리고.
사실 AI도 모른다. 그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많은 지식들을 긁어서 아는 척을 하는 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모르는 걸 아는 사람은 GPT도 모른다는 걸 안다. 오답을 내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쓰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게 어차피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아니까. 주어진 시간 내에 찾을 수 있는, 가능한 한 타당한 것을 근거로 더듬어나가면 된다.
그런 여유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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